영화 남한산성의 주역 최명길의 묘소가 청주에 있다. 그가 죽은 지 371년이 지나는 동안 외지 참배객이 거의 없었지만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청의 침략을 자초한 것도,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느라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것도 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명분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이 영화를 통해 알려지면서 묘소도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청에 항복한 후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 종살이를 한 것도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청과 전쟁을 하면 무고한 백성만 죽게 된다고 입이 닳도록 호소한 게 최명길이다.


항복을 주장하면 역적누명을 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항서를 쓴 것은 일신의 명예보다는 백성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 치욕을 감추기 위해 가급적 병자호란을 거론하지 않았던 게 조선의 역사였다.


어떤 전쟁도 국난극복의 영웅이 있게 마련이지만 유독 병자호란만은 영웅이 없다. 영화 남한산성 등을 통해 병자호란의 중심인물이 최명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참배객도 늘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묘소를 찾아가면 왜 국난 극복의 충신으로 숭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숙종 때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자를 읽을 수가 없다. 설혹 글자를 읽는다고 해도 그 어려운 한자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도비 옆에 충북도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는데 그곳에는 청과의 강화를 위해 항서를 썼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적과 싸우다가 죽은 장군도 아니고, 겨우 항서를 쓴 사람이 왜 충신인지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을 풀기위해서 인터넷을 뒤졌다. 겨우 발견한 신도비 번역문을 읽었지만 그 역시 난해했다. 역사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역사책을 뒤적이며 비문을 해독해 가면서 최명길을 왜 한 시대를 구한 충신이라고 평가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최명길은 쇠퇴해가는 명에 대한 의리만 지킬게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는 청과의 관계도 정상화할 것을 주장했다. 청의 사신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서조차 받지 않았다.


이때도 입이 닳도록 그렇게 하면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예측대로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피난할 새도 없이 적군이 들이닥쳤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기위해 최명길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만나 시간을 끌었다.


호란이 끝난 후 청은 툭하면 명을 칠 군사를 파병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마다 명과의 의리를 배반할 수 없다며 거부하다가 청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독보라는 승려를 통해 명에 밀서를 보내다가 발각되어 청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그 책임을 임경업에게 돌리라고 권했지만 자신의 책임이라며 거부했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백성들이 장례준비를 해갖고 따라갈 정도였지만 본인만은 태연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최명길은 영의정으로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는데 진력했다. 화냥년이라고 송환을 포기했던 여자들을 송환하기 위해 특별기구를 만들었고, 송환된 여자들을 구박하지 못하도록 했다.


소의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호미나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대량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인조가 우울증에 빠져 국사를 팽개치자 심기를 바로잡도록 독려한 것도 그였다.


이런 내용은 영화나 소설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이것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를 충신이라고 부를 이유도 없다. 다행히 지난 3월 9일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최명길 학술발표대회가 열렸다.


기념관 건립, 관광코스 개발 등의 제안이 쏟아졌다. 우선은 신도비를 읽을 수 있어야 구국충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신도비를 해설하는 안내판을 만드는 게 급해 보인다. 그다음은 외지에서 찾아오는 참배객을 위해 진입로 확장, 주차장 확보, 유물관 건립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참배객이 비문을 읽고 공감하면 각종 기념사업도 국민적인 성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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